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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연출_SBS

mentor 2019.11.04 21:43 조회 수 : 1809

입사지원 동기[1000자 이내]

[왜 예능 프로그램은 한류열풍이 없단 말인가]
"Ctrl C, V"는 예능 프로듀서의 필수조건이라는 말이 얼마 전까지 통용된 불편한 진실이었습니다. 일본 프로그램을 자주 즐겨보던 저는 왜 한국의 프로그램이 일본의 프레임 속에서 카피 혹은 포맷의 미묘한 변경을 통해 컨텐츠를 도둑질해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창작의 고통 못지않게 표절의혹의 모니터링을 피하는 것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대한민국 PD분들에게 경외감과 더불어 안타까움이 일어났습니다. 한편으로는 '나는 적어도 남의 것을 손대진 않겠다'는 자신감을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훗날 완전한 창조는 불가능하며 모방을 통한 재생산만이 트렌드를 따르는 중요한 방안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방송제작은 참여했던 경험은 없지만 중고교시절 학생회장을 하면서 축제 및 다양한 행사를 기획 및 총괄하며 프로그램 제작에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EBS방송국에서 저희 고등학교를 취재하면서 함께 기획을 짜고 학생과 스태프가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경험은 제게 방송국 PD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매력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대학시절에는 총학생회 사무국장을 역임하면서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인들의 대규모 축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기획했습니다. 조직을 재정비하고 홍보, 섭외, 무대, 지원부서등 TFT를 조직해 학우들에게 인상 깊은 축제를 선사했던 경험은 꿈을 향한 도약기였습니다.
사실 저는 방송프로그램 제작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나타냅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도화지에 앞으로 그려나갈 다양한 경험들을 통하여 SBS가 원하는 예능 PD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100% 다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졌던 일 중 가장 도전적이고, 어렵다고 느껴졌던 경험에 대해 기술하여 주십시오.(일의 배경, 그때 느꼈던 감정, 어려웠던 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했던 행동, 일의 결과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시고 제목을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1000자 이내]

[카메라만 없었을 뿐입니다]
연극영화과를 나온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에 준하는 열정과 자부심을 한 때는 가졌었습니다. 저는 남들과는 다른 학창시절을 보냈었습니다. 중학교 3년간은 XX시 100m 육상대표 선수로, 고교 3년간은 연극부 생활을 하며 희극인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고교 2학년 시절, 한 선배가 학교폭력에 관련된 글로 XXXX문예에 당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느낌이 왔습니다. XX시 고교 연극제를 세달 앞둔 시기에 좋은 시나리오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선배의 동의를 얻어 몇 주간 각색을 통해 연극 대본을 만들었습니다. 법정을 주제로 한 30분짜리 단막극이었는데 이를 위해 3달간 강당에서 숙식을 하며 연극 자체를 즐겼습니다.
연극부 대표이자 기획자로서 담당 선생님의 암묵적인 야간자율학습 면제의 도움을 통해 열심히 준비해갔습니다. 소품부터 무대까지 직접 만들며 고교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갔습니다. 모교 축제에서 처음으로 시연을 한 후, 결국 OO시 청소년 문화센터에서 열린 고교 연극제에서 심사위원들의 최고점을 획득하며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대학까지 이어져 ROTC 생활을 하기 전인 2학년까지 그 열정은 식지 않았었습니다. 전역 후, 직장생활과 유학준비를 통해 정신없이 달려오면서 방구석에 놓인 고교시절의 연극사진을 보며 다시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대한민국 최고의 예능 PD가 되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스터디원들과 함께 언론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해오던 방식과는 다른 아이디어나 방식을 생각/제안하거나 직접 시도해 본 경험에 대해 기술하여 주십시오.(그것을 제안하거나 시도한 계기, 그때 느꼈던 감정이나 행동, 그 일의 결과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시고 제목을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1000자 이내]

[생각의 전환, Switch on]
대학시절 비운동권 총학생회 사무국장으로서 학교 축제를 기획하고 준비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 학교의 축제는 전국에서 가장 재미없는 축제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었습니다. 축제준비의 기획을 맡고 있는 저로서는 이러한 평가를 우리 대에서 끊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먼저, 축제 전담 T/F팀을 만들어 야심찬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우선 기존 축제의 문제점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학우들의 소속감 부재, 단과대 집행여건 보장미흡 등의 문제들이 제기되었습니다. 각 단과대의 학생회장들과의 회의를 통해 축제의 취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습니다. 그 후, 학우들이 가장 원하는 축제가 무엇인지 설문을 받아 전반적인 아웃라인을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고질적인 문제는 학우들의 소속감 부재였습니다. 학우들의 편견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하나"라는 컨셉을 최종으로 결정하고 외부업체를 섭외해 홍보를 다양화해 나갔습니다.
드디어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실무단을 교문에 배치해 함께 티셔츠를 나눠주며 관심을 유도했습니다. 티셔츠를 입은 학우에게는 학내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을 주자 자연스럽게 관심이 유도되었고 캠퍼스는 축제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찼습니다. 학우들이 원하는 강연을 위해 인기 연예인인 OOO을 직접 찾아가 섭외하였고 캠퍼스를 자유롭게 거닐게 하여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또한, 축제의 백미로 대학축제 사상 처음으로 번지점프를 설치해 직접 시범을 보이며 폭발적인 참여를 유도했습니다.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인기가수들을 무대에 올리며 멋지게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다양한 노력들을 통해 학우들의 단합을 이끌어 내었고 초록색 티셔츠는 지금도 학교를 물들이며 임기 후 가장 재밌고 혁신적인 축제였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문제를 인식만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OO색 물결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입니다. 도전과 열정을 통한 실천력을 바탕으로 시청자의 안방에 웃음바이러스를 전파하겠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공동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했던 경험에 대해 기술하여 주십시오.(일의 배경과 목표, 본인의 역할과 진행과정, 그때 느꼈던 감정, 어려웠던 점, 일의 결과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시고 제목을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1000자 이내]

[Impossible is nothing]
사회생활의 첫 시작인 OO건설에서 건설현장으로 배치되어 "현장관리" 업무를 수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장관리는, '현장의 어머니'로서 경영학의 모든 분야를 실무에 직접 적용할 수 있었던 점에서 매우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직무였습니다.
저는 당시 도급액이 OOOO억이 넘는 2곳의 주택현장을 겸직했습니다. 저가수주에 관리미숙으로 원가율이 좋지 않았던 두 현장은 이미 적자를 넘어 원가율은 120%를 넘기고 있었고 공정율은 35%로 골조가 시작되는 단계로 원가투입이 앞으로 더욱 증가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건설경기 악화에다 대내외의 악재가 잇따른 상황에서 사업부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이 현장은 원가절감의 노력이 절실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현장의 직원들의 의기투합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재무담당으로서 제가 내린 해결책은 효과적인 자재수급을 통한 원가관리와 손익분석을 통한 경상비지출의 최소화였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현장을 돌아다니며 자재를 직접 관리하여 재고를 최소화하고 달성율을 확인했습니다. 1년간의 노력 끝에 두 현장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100% 원가율 달성으로 사업본부 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소신, 원칙이나 기준을 지키려 하지만 상황적으로 지키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갈등을 겪었던 경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주십시오.(그때 상황, 느꼈던 생각과 감정, 일의 결과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시고 제목을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1000자 이내]

[원칙은 대의를 위해 존재합니다]
제게는 가족보다 소중한 32명의 동생들이 있습니다. 사는 곳도, 생김새도 모든 것이 다 연관이 없는 저의 동생들은 국가를 위해 2년간 한 공간 안에서 지내며 다양한 추억들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육군 포병장교로 최전방부대에서 2년 4개월 복무했습니다. 군단 유일의 OO장교였기에 소대원들과 다양한 작전과 파견업무를 많이 수행했기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원칙을 갖고 소대원을 이끌어 나가며 할 땐 하고 놀 때는 화끈하게 노는 소대운영방침을 세웠습니다.
혈기 넘치던 초임장교시절 제 가슴을 아프게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 전입을 온 신임 소위시절 많은 도움을 주었던 분대장에 관한 일입니다. 시 육상대표로 활동했던 저의 성향과 비슷하게 태권도 국가대표로 활동했던 그 친구는 저와 성향이 잘 맞았습니다.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공치사를 하지 않는 남자다운 강인함을 좋아해 가까이 두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전입오기 전부터 소대에서는 이 친구의 폭정으로 인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결국 폭행사건이 터지고 사태가 심각해져 상부에 보고되기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사태의 진화'냐 '영창'이냐, 소대원을 한 곳으로 불러 모아 엄하게 다그치며 수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항상 '가족'을 중시해왔던 제게 어떠한 결정도 위배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소대원들은 이미 그 친구를 영창보내기를 제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31명의 가족을 저버릴 수는 없었기에 '읍참마속'의 심경으로 그 친구를 영창으로 보낸 후 타부대로 전출시켰습니다. 그동안 제가 강조한 '우리는 가족'이라는 원칙은 깨졌지만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혼자만의 원칙은 공염불이었습니다. 대다수가 공감하는 원칙, 이를 위해 자신의 신념도 포기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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